9 Feb 22' 예쁜 미대생, 필사
- Jeong Hanna Raphaela Heo

- Feb 9, 2022
- 4 min read
Updated: Feb 11, 2022
어제 오늘을 계획할 때 부터 오늘 외래에 들른 후 수녀원에 갈 생각이었다. 병원에 들르고 나니 기분이 더 싱숭생숭 해져서 성당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마음의 평온을 조금씩 찾을 수 있는 곳, 성당.
성당에 오후 한시 쯤 도착해서 우선 대성전으로 향했다. 대성전은 평일에는 오후 4시까지 개방되어 있는데, 불이 꺼진 채 햇살만 가득하게 들어오는 이 곳은 참 평화롭다. 은근히 평일에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꽤 있다. 늘 5-6명은 있는 것 같네. 가만히 앉아 하고 싶었던 생각을 하고, 머릿속에 떠다니던 생각들은 수렴시키고, 그리고 나서는 혼자 기도를 했다. 늘 비슷한 기도지만 날마다 간절함은 다르다. 혼자 기도할 땐 집중이 더 잘돼서 엄청 울지만 그러고 나면 마음이 선선해 진다. 마음에 살랑이듯 부는 선선함,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 아닐까? 어쩌면 모두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낸 후 언제나처럼 성당 바로 뒤에 있는 수녀원으로 향했다. 날 예뻐하시는 마리헬렌 수녀님이 계신 곳! 프랑스에서 시작된 수녀원이며, 이 곳 수녀원의 이름은 Sisters of Saint Paul of Chartres이다. 다양한 수녀원이 있지만 이 수녀원은 대구와 명동에 하나씩 있다고 한다. 도착해서 게이트 앞에서 전화를 드리면 수녀님이 날 데리러 나오신다. 그러면 출입 대장을 작성하고 매번 향하는 수녀원 내 도서관, 항상 이 곳에서 수녀님과 시간을 보낸다. 수녀님은 김연아를 참 좋아하신다. 오늘도 함께 영상을 몇 개나 봤는지 모른다.
언제나 처럼 수녀님들의 잿빛 앞치마를 입고 수녀님의 일을 도와드렸다. 아무래도 수녀님이 나이가 있으신 데다가 다리를 다치신 상태라 무거운 걸 드시기는 어려우니까, 함께 일을 조금씩 거들어 드리는 거다. 수녀원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는 것도 재미있고 좋다. 마치 유럽의 어느 골목길 같은 느낌이 드는 예쁜 곳. 수녀원 안을 돌아다니다 다른 수녀님들을 만나면 언제나 온화한 미소로 날 반겨주신다. 그러면 우리 수녀님은 나를 예비 신자이지만 웬만한 신자들 보다 믿음의 길을 훨씬 열심히 걸으며 노력중인 라파엘라 라고 소개하신다.
그리고 수녀님께 물어보려고 따로 표시해 놓았던 것을 드디어 여쭤 보았다. 대천사 성 라파엘에 대한 기도가 이렇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화살이요 약이신 라파엘 대천사여, 불타는 사랑의 상처를 저희 마음에 내시고, 저희가 그것을 영원히 보존하게 하시어, 저희도 매일같이 사랑의 길을 걸으며 사랑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소서.' 근데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거다. 불타는 사랑의 상처를 저희 마음에서 없애달라 기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상처를 달라고 하는건가, 전혀 이해가 안됐다.
수녀님께 여쭸다. "수녀님, 상처를 없애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수녀님은 엄청 웃으시다가 "나는 바로 이해가 되는데~" 하고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셨고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상처를 입으신 것 처럼, 정말 너무나 사랑하면 마음에 불타는 상처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거다. 따라서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마음을 주세요'의 뜻이 되는 거라고. 오... 이해가 되었다. 수녀님께서는 저기서 말하는 '사랑'의 대상은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다른 대상이 생각 났다. '불타는 사랑, 상처. 아마도 내가 누군가를 진정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었나 보다.' 하면서 말이다.
수녀님과 도서관 내 일들을 하면서 많은 대화를 한다. 믿고 내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다행인 일이다. 나의 모든 마음과 생각, 나의 죄책감과 미안함, 나의 가족들, 나의 모든 결을 섬세하게 알고 계시는 수녀님이다. 참 감사하단 생각을 하다가 또 다시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수녀님께 마음을 열고 의지라는 걸 하려는 것 같은데, 또 다시 어떤 이유로든 내가 슬픔에 잠식되는 순간이 올까봐 겁이 난 거다. 수녀님이 다른 수녀원으로 이임 되시거나,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시니 수녀님을 떠나 보내야 하는 순간이 언젠가는 닥칠 것이니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내게 이토록 무섭고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내가 마음 주는 걸 그만큼 어려워 하기 때문에 한번 마음을 주는 일이 적고, 그래서 한 번 주고 나면 거의 강아지가 주인을 사랑하는 것 처럼 맹목적인 사랑을 하는 것 같다. 만남에는 이별이란 변수도 따라온다. 그렇다고 해서 내 삶에 사람을 들이지 않을 수는 없으니 참 고역이다.
어쨌든 오늘도 수녀님과 다양한 대화를 나누며 수녀님에 대한 애정이 더 생겼다. 수녀님은 영어에 관심도 많으시다 보니 얘기할 수 있는 주제가 다양하다. 때로는 나의 유학 생활에 대해 물어보시기도 하고, 수녀님이 영어로 쓰신 글을 보여 주시기도 하고, 영어 공부 방법을 알려드리기도 하고 말이다. 오늘 어쩌다 나의 전공 얘기가 나왔는데 수녀님은 내가 미대생인줄 아셨다고 한다. "정이는 미술 전공했잖아-" 하고 말씀을 시작 하셔서 당황했다. 수녀님은 내가 예쁘고 감성도 섬세한 것 같아 당연히 예술 하겠거니 생각 하셨다고 한다. 기분 좋은 이유였다. 수녀님은 내가 믿음을 갖기 시작한 후로 점점 더 얼굴이 예뻐지는 것 같다고 하신다. 히히.
수녀님의 일을 도와드리고, 수녀원 내 도서관에서 성경 필사도 하고, 수녀님과 얘기도 나누고, 그러다가 6시 미사까지 참여하고서 나는 카페로 향했다. 갈 때 마다 무언가의 이유로 이용하지 못했던 카페, 폰트. 우리 집 바로 근처여서 평일이니 사람 없겠지 하고 호다닥 갔다. 예상했던 것 처럼 사람이 바글바글하지는 않았다. 나는 카페에 가면 바닐라 시럽을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지 묻곤 하는데, 직접 만든다고 하면 보통 아바라를 마신다. 까만 바닐라 빈 콕콕 박히고 덜 달게 만드는 수제 시럽이 좋아서다. 이 곳에서도 직접 만든다고 하길래 아바라를 시키고 벨을 받았다. 신기하게도 조명이 켜지는 버섯 모양의 벨이었다. 색도 다양했는데, 코퍼 색을 주시길래, "저 저거 퍼플블루 색 주시면 안돼요...?" 하고 저 버섯 벨을 받아왔다. 예쁘다.
자리에 앉아서 성경 필사를 시작했다. 마르코 복음 1장부터 9장까지 썼는데, 16장까지 써야 해서 아직 꽤 남았다. 미루는 것 싫어하기 때문에 이번 주 동안 다 끝내서 주말에 내고 올 심산이다. 필사를 하다보니 곧 음료가 나왔다. 실망이었다. 바닐라 빈은 없었고, 바닐라 향이 진하지 않았고, 너무 달았고, 커피는 너무 연했다. 이 곳은 원목을 많이 사용한 인테리어가 예쁘고, 따뜻한 주황색 조명도 예쁘고, 화장실에 놓인 이솝 핸드워시/핸드밤도 센스 있지만 음료는 별로인 걸로. '그런데 카페의 기본은 '음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스치네.
저 브라우니는 수녀님이 먹으라고 주신 홍철책빵의 브라우니인데, 달달이 마니아 노홍철의 베이커리라서 그런지 정~말 달고 꾸덕꾸덕 했다. 마치 파베초콜릿을 먹는 것 같았다. 응 브라우니 아냐, 초코야.
오늘 병원에 다녀오며 지치고 속상했다. 내 마음도 모르고 화창하고 포근한 날씨가 야속했고 싱숭생숭 하기도 했다. 나의 겨울은 병원 생활과 함께 삭제되었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성당에 들러서 훨씬 나아졌고, 평온을 좀 얻었고, 카페에서 영업 종료 때 까지 홀로 시간보낸 것도 좋았다. 잠만 잘 자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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