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Jan 22' 진리의 추구 & 의지
- Jeong Hanna Raphaela Heo

- Jan 2, 2022
- 3 min read
Updated: Feb 5, 2022

"너?", "네가?", "교리반?", "진심?", "아니 너 진짜 죽을 때 된 거야? 뭐야;;"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다. 나는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그만큼이나 종교와 거리가 먼 사람이다. 뭐랄까, 느낌상 절대 교인은 아닐 것 같은 사람...? 하지만 알고 보면 나의 외가는 모두 천주교다. 모태신앙인 엄마도 세례를 받았고, 젊었을 때는 엄마 쫓아 도림동 성당에 갔던 기억이 내게도 있다. 큰이모는 매일 성당 나가는 정말이지 독실한 신자다. 나는 조금 희한한 종교관을 가졌었다. 나는 늘,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신'이 갖고있다는 힘의 존재를 믿었다. 하지만 그 힘이 의인화 되어 '부처님', '예수님', '알라' 등으로 불려질 때, 난 단 한 번도 믿음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웃기게도 나는 늘 '진리'를 추구했다. 모든 종교에서 추구한다는 그 것. 처음에 어쩌다가 진리에 관심을 갖고 고민하게 되었는지는 하도 오래돼서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하도 '진리'라던가 '원죄', '축복', '고난', '선물' 과 같은 단어를 많이 사용해서 개중에는 내가 종교인이라고 생각하거나 또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며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나름 독실한 종교인인데도 나만큼 '진리'에 대해 고찰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는 거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저는 종교인이에요" 하는 아무개 보다 종교의 본질에 더 다가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진리에 대한 나의 해석은 오로지 이성적 판단을 근거했다. 인간에게는 감정과 지성이 있기에 기본적으로 우리의 두 눈으로 무언가를 정말 있는 그대로 보고 인식하는 게,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자연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원죄다. 감성과 지성, 그 외의 온갖 감정과 생각이 다 작용해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에는, 말하자면 우리 인간의 시력이 너무 나쁜 거다.
내가 생각하는 '진리'는 이렇다. '사물'이 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건 '사실'이다. 나는 '사실'이 곧 '진리'라고 생각했고, '진리를 깨닫는다'라는 표현은 '어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라고 믿어 왔다. 결국 진리를 깨닫는단 것이 내게 있어서는 다만 내가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이 가진, 눈에 있는 뿌연 상을 또렷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인식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전제가 나에게 늘 있기 때문에 나를 정제하는 노력을 들이는데 그 과정이 참 어렵다. 나쁜 시력을 가진 내 눈이 사실을 잘 볼 수 있도록 안경을 씌워주면 되는건데, 말이 쉽지 그 과정은 너무 어렵고 힘든 거니까... 안경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지도 않으며 그저 직접 고민하고 시행착오를 거쳐 나가야 하는 거니까...
가끔 너무 화딱지가 난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해?' 싶기도 하고... 그래도 그런 정제를 계속 하면서 살고, 말하고, 행동하다 보면 타인과 부딪힐 일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긴 하다. '그런 노력이 계속되어 쌓이고 쌓인다면, 내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된다면, 그렇다면 사람들과 좀 더 따뜻한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 그 노력과 따스함이 켜켜이 쌓이면 어느 날에는 내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는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가 있을거라 믿으며 열심히 의미부여 하며 산다.
그렇게 의미부여 하며 살다 정말 큰 시련을 만났다. 내가 언제쯤 이겨낼 수 있을지, 이겨낼 수는 있는 건지 감도 안 잡힌다. 나는 평생 시련을 꽤나 기쁘게 받아들이고 선물이라 여기며 살았다. 시련의 댓가로 늘 후한 가치와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에 감사했고 나아가 그렇기에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생각 역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 다르고,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왜 이번의 시련이 다른지는 바로 다음 주에 어쩌다 성당에 가게 됐는지 따로 글을 쓰고 싶으니 그 얘기는 미루어 둔다. 뭐 어쨌든, 내 삶이 꽁꽁 얼어붙은 상황에 내가 누구보다 사랑한 이는 종교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꼭 그가 아니더라도 내 친구들도 종교의 힘을 빌려 보라는 말을 줄곧 했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에 대해 꽤 알고있었던 것 같다. 나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게 되는 상황을 엄청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나는 마음이야 얼마든 내어줄 수 있을 만큼 사랑이 가득하고, 내 어깨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조건적으로 내어줄 만큼 꽤나 지고지순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역으로 누군가 내게 어깨를 빌려주는 걸 허락해 본 적이 없고 왠지 모르겠지만 그에 대한 공포가 너무 크다. 실제로 기대 본 경험이 거의 없는데 아마 그래서가 아닐까 싶다. 경험이 없고 낯서니까, 상처 받을까 두려워서가 아닐까? 나는 부모님에게도 기대 본 경험이 없다. 내 앞가림은 줄곧 내 스스로 해왔고, 늘 그래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람을 너무 좋아 하면서도 보통 사람들은 나처럼 무조건적으로 무한히 어깨를 내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서, 그들이 내어주는 어깨에는 조건과 끝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아서, 나는 어깨를 내어주면서도 역으로 받지는 못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열심히 살다 정신 차려보니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건 이미 내게 정말 두려운 일이 되어 있었다. 기대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의지를 하기 시작할 즈음, 여태 내가 경험해본 적 없는 그 바운더리를 넘을 때에 내가 필연적으로 불안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 역시 2021년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기대본 적 없는 나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기 시작하는 내 스스로를 인지했을 때, 큰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스스로와의 대화가 잦고 그래서 내 스스로에 대한 이해도가 좋은 편이라고 생각 했는데, 생각도 못해본 나의 모습이어서 그 시간들이 당황스럽고 힘들기도 했다. 날 애정하던 사람들은 그런 내 모습을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고, 도움을 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나는 지금까지도 어려웠지만 앞으론 누군가에게 의지하기가 정말 어려울 것 같다. 못하지 않을까? 못하는 한 편 언젠가 누군가는 내게 내가 내어주는 것과 같은 무조건적인 어깨를 내어주길 바라며 살아가겠지 뭐. 이제 정말 의지하고 마음 둘 곳을 종교 아니면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종교에서 조차도 찾을 수는 있는 건지 아직 잘 모르겠다.
일단 내가 진짜 죽을 것 같으니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진짜 나 좀 살려달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비신자 수업을 들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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