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9 Dec 21' 입원일기 7: 겨울 냄새

  • Writer: Jeong Hanna Raphaela Heo
    Jeong Hanna Raphaela Heo
  • Feb 8, 2022
  • 3 min read


오늘은 새벽 5:20쯤 깼다. 다시 자기가 어려워서 창문의 바람 구멍에 코를 갖다대고 바깥의 겨울 냄새를 맡았다. 아침 공기만 가진 특유의 흙 냄새, 풀 냄새, 거기에 겨울의 찬 공기가 만나면 정말 청량하다. 기분이 좋아지는 시간. 다시 잠을 청하기가 어려워서 지금 밖으로 나와 티비도 보고, 신문도 읽고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코로나가 난리다. 어제 확진자가 7175명 이었대. 내가 이 곳에 들어올 때만 해도 2-3천명대 였던 것 같은데... 이대로라면 월말에는 확진자가 1만 2천명이 될 거라고 한다. 여기에서 퇴원하고 나간다 해도 코로나 때문에 돌아다니기 어렵고, 할 일 없고 무료하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네.


신문을 읽다 인상 깊은 기사를 보았다. 양방언씨의 데뷔 25주년 기념 기사였다. 양방언씨는 피아니스트, 음악가이자 정말 뛰어난 음악 디렉터다. 내 기준에는 Andrew Lloyd Webber와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이다. 한국 특유의 악기와 소리를 현대적인 느낌으로 잘 사용하는 멋진 사람. 나는 그의 음악 중 Frontier와 prince of jeju라는 곡을 정말 좋아한다. 유명하기도 하지만 내 귀에도 너무 좋은 곡들. 그는 현재 62살인데 데뷔 25년을 맞았으니, 37세 즈음 처음 음반을 내기 시작했단 얘기다. 너무 대단하지 않은가 생각했다.


서른 일곱, 이제 고작 서른이 되는 나도 '새로운 시작'과 '변화'를 생각하면 물론 설렘도 있지만 내가 잘 해낼 수 있으려나 하는 걱정이 앞서는데 서른 일곱의 나이에 데뷔했다니. 내가 봐도 정말 멋진 저 사람의 시작이 그렇게나 늦었구나 싶으면서 late bloomer라는 표현이 스쳤고 늦게 피는 꽃이 아름답다는 말이 생각났다. 당장은 얼어붙은 내 세상이지만 또 다른 희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또 다른 내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자신감이 그 기사를 보며 조금 생겼다. 요 근래에 '희망' 혹은 '한 줄기 빛'을 느낀 유일한 순간이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고, 희망을 주고, 영감을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정말 멋진 사람이 아닐까 싶다. 나도 그런 멋진 사람 될 수 있을까? 기분이 좋아지는 기사였다.


오늘 부터는 하루에 3회 전화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두 번째 입원을 시작한지 8일 만에 바깥 세상과의 소통을 시작하는 거다. 엄마에게 문제집을 사달라고 하고 싶다. 병원 생활은 시간이 정말 안 가니까 수학 문제집을 풀면 시간이 잘 가고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아침 8시가 좀 지나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이제 좀 괜찮아 졌니...? 엄마도 마음이 너무 힘들다..." 라는 말을 했다. 스스로에게 "물 흐르듯 시간을 흘려 보내자"며 얘기하고 노력 하다가도 이렇게 '현실'을 말하면 아직 마음이 너무 힘들다. 더 얘기하기 싫어졌다.


'지금 내가 보내는 이 시간은 현실에서 도망쳐 나와있는 시간인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맞다, 나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지. 이 곳에서의 답답함도 문제이지만 나갔을 때의 답답함도 있겠지. 잠시 잊고있던 현실이 떠오른다. 걱정이 된다. 미래를 기약, 미래를 기약, 미래를 기약, 지금 나는 내 삶에 대한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상태일까?


오전 11시, 방금 아빠와 통화를 했다. 확실히 엄마와 통화하는 것 보다는 훨씬 나았다. 내가 불편하지 않게 배려해주는 것 같았고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아빠에게 오늘 아침에 읽은 양방언씨에 대한 이야기도 해 주었다. 아빠는 내가 뭔가 새로운 도전들을 했으면 하나보다. 나는 말이야, 나는, 나는 아직 미래를 말하기 어렵고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 새로운 도전 좋지, 나와의 대화 좋지, 다 좋아. 근데 그냥 내 상태가 아직 준비되지 않은 걸 어떡해. 차근 차근 한 걸음씩 하자.


주치의 선생님을 만나고 돌아왔다. 내가 어떤 생각들을 하며 지내는지 또 다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내가 그린 감정 그래프를 보며 과거와 과정과 현재를 얘기했다. 부모님과 오랜만에 통화하니 어떤지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눴다. 느낀 그대로를 얘기했다. 이 글에 적은 그대로.


선생님에게 ”저는 어떤 disorder가 있어요?“ 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maniac은 정상 상태와 별 차이 없이 아주 조금 보이고, depression이 크게 보인다고 했다. 아마도 내가 bipolar type 2를 앓는 것으로 추정 된다고도 말했다. 의외였다, bipolar…?


선생님은 나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이유인 즉슨 내가 나의 생각과 감정을 굉장히 잘 인지하고, 그런 감정과 생각의 기저 원인, 뿌리를 잘 찾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나처럼 감정의 스펙트럼이 넓고 촘촘한 사람들은 감정의 이동과 변화가 빠른 템포로 이루어져서 스스로의 감정을 잘 쫓아가지 못하는데, 나는 내 기분과 상태의 변화 하나 하나를 잘 따라간다고 했다. 쉽게 말하면, 그냥 머리가 좋은 것 같고 사유가 잘 되니 금방 나아질 것 같다고 한다. 기분이 좋더라.


살면서 가볍게든 심하게든 한 번쯤 우울증을 앓는다고 한다. 그 때 회복 속도는 나의 생각 속도, 그리고 의지와 비례한다는데 내가 나의 생각과 마음을 잘 읽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갖지 못한 탁월한 능력이라고 했다. 사실 처음 입원했을 때는 내가 빠른 시일 내 나아질 거란 기대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전에 내가 언제쯤 나갈 수 있을지 물어봤을 때 "푹 쉬자"고 했던 거라면서. 몇 일 면담을 해보니 내가 내 생각을 빠르게 잘 펼쳐서 긍정적이라고 한다. 정신과 선생님들은 정말 솔직한 것 같다. 처음 내 상태를 어떻게 생각 했는지, 예상 입원 기간은 어느정도 까지나 생각 했는지, 전부 다 알려주는 걸 보면 말이다. 처음에는 나아질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고 최소 8주는 입원 하겠구나 싶었단다. 뭐 저리 필터가 없는지, 업의 특성상 솔직한가 보다. 거짓으로 알려주는 것 보다 솔직한 생각을 알려주니 믿음이 생기고 좋았다.

Comments


+82-10-2393-0890

SOMEWHERE IN BANPO, SEOUL, KR

  • Facebook
  • Twitter
  • LinkedIn

©2022 by Jeong Hanna Raphaela Heo

bottom of page